아버지 의 자서전

아버지 의 자서전 5

따뜻한 하루 2016. 1. 31. 13:00

아버지의 자서전 5

 

아버지는 차를 안 타시고 소를 몰고 홀로 걸어오셨다 

나는 식구와 차을 타고 만세교안 문아리에 도착했는데  피난민이 되었다.

피난민은 무척 많이 모이고 이곳이 일차 집결지이다.

하룻밤을 자고 오후에 아버지는 중도에서 소를 팔고 무사히 도착하시어 우리 식구는 다 모였다.

소는 중도에서 얼마 받고 가만히 보니 여기저기서 젊은 사람들은 노무자로 데려가기 시작한다

나는 노무자로 붙잡혀가려니 각오하고 나에 중 이적삼 한 벌을 따로 싸 놓고 있었다.

하느님과 조상님이 도우셨는지 문아리에서 다시 트럭에 짐을 싣고 출발하여 의정부역전에 도착하여 모두 하차했다.

해는 오후 다섯 시가량 되었는데 , 기차 화물칸에 짐을 싣고 우리 식구는 한 곳에 다 탔다

 

나는 첨 기차를 탓다

기차가 출발하였다.

아버지는 서울을 향해간다고 하셨다.

얼마쯤 가서 정거했는데 창동이라 하였다.

정거한 지 무려 한 시간  기차가 서 있는 데 아버지는 기차에서 내리셔 가시더니 한 집에서 소금을 몇 되 가지고 오셨다.

기차가 출발하여서 밤인데 아버지는 한강철교를 지나간다고 하셨다.

기차는 힘도 안 드는지 밤새도록 달려가는데 날이 새어 해가 떠오른데 충청도라 하였다 ,

얼마 또 가서 기차가 섰다

대전역이라 했다.

기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앉아 있는데 얼마 후 기차는 다시 상행하여 올라오기 시작하여

경기 평택 역전에 도착했는데 하차하랜다.

하여 기차에서 내리니 여러 피난민은 옷과 얼굴에 먼지에 말할 수 없는 흉한 몰꼴이었다.

병중에 업혀서 옮기는 사람 손을 잡고 따라가는 사람 그 딱한 처지를 어찌 다 표현하리오...

역전마당에서 피난민이 가득히 하룻밤을 새웠다

 

때는 6월 초였다.

오후에 각지로 분산시키는데 우리는 경기평택군 송탄면 칠원리로 가라 하여 봇다리를 지고 칠원리 마을을 찾아갔다

누가 반가워하는 사람이 오라 했는지 마을에 다 가니 해는 졌는데 동네 구장을 찾아 얘기하니 동네복판 공회당으로 안내해 줘서

공회당에다 봇다리를 들려 놓고 저녁을 지어먹고 밤을 지냈는데 때는 유월 초순이다.

그다음 날 아침에 우리 피난민중 한 사람이 보이질 않아 그 가족에선 어디를 일찍 갔는가 몹시궁 금했는데

그 동네에서 야단이 났다.

수많은 대동 복판에 두래 우물이 있는데 중국군 신발 신은 사람이 빠져 죽었다고 야단이다

우리 피난민들이 몰려가 우물을 보았다

피난민 한 사람인 냉정리 이영호 아버지 이 태산이라는 사람이다.

피난민 일행은 시체를 우물 속에서 꺼내놓고 그 우물에  물을  퍼내고 , 물이 고인 다음에 또 퍼내고 우리 피난민이 먼저 그 물을

먹은 다음에 동네 사람들이 먹기 시작하였다.

그 시체는 공동묘지에 장사 지냈다.

산 설고 물 설은 타도 타향에서 우리 피난민은 많은 괄시를 받았다.

 

 

 묘소:철원군 동송읍 상노리 중구재 산 662번지 축좌 미향
풍천임 씨 이 시며 1889년 기축 3월 15일생이시며 1951년 신유 6월 12일 6.25 동란 중 평택에서 졸하셨다.

 

우리 어머니는 겨울과 봄에 장 질 부사병으로 오래 고생하시다가 성치 않은 몸에 잘 잡수지도 못하고

수백리 차를 타셨으니 약하신 몸에다  멀미로 말할 수 없는 고충을 격으셔 ,

지금 생각하면 빈혈로 밤에 낙성을 하셨다.

나는 모진 잠에 어머니가 낙성하신 줄도 모르고 있었다.

삼사오일이 지나 어머니는 점점  쇠약해지시며 환우는 점점 우중하시다

환우 중에 따스한 방에서도 편치 한으신데 마룻바닥이니 불을 땔 수 있나 나무도 없어서 밥을 지어먹는 나무도 풀을 말려 땠는데

산이나 논둑에서 풀을 깎으면 풀을 못 깎게 해서 공동묘지에서 깎아다 말려 서 때서 밥을 지어먹으니

대한민국 품 안에 들어서 좋았으나 우선은 고충이 많았다.

하루 이틀 지내다 보니 어머니 환우가 위독하시다.

무녀에게 물어 빌어본들  효염은 조금도 보이질 않고 점점 위독하시어 음 6월 12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원망스럽고 원수에날 오후 3~4시에 나에 어머니는 말 한마디 못하시고 영원이 운명하셨다.

나는 이 글을 쓰다가 눈물이 흘러  앞을 가리고 종이가 젓어 잠시 글쓰기를  멈추었다가 다시 계속 쓴다

 

선산아래 어머니 묘소 2015년 선조님 묘소 사초 후 재 단장하였다.

 

우리 내외와 누님은 어떻게 할 줄 모르고 눈물로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손수 평택읍에 가셔서 베와 칠성판을 사가지고 오셨다.

저녁때 아버지와 마주 앉아 어머니에 염습을 하였다.

6월 13일 동네 한 댁에서 가마니와 삽을 빌려주셔서 우리 피난민 일행은 어머니에 시신을 모시고 가서

경기 안성군 원곡면 공동묘지에 어머님에 시신을 모셨다.

장례가 끝나고 공회당에 어떻게 왔는지 생각이 안 난다.

6월 16일 아침에 어머니 묘소에 집 식구들과 다녀왔다.

며칠 후 동네 구장이 와서 하는 말이 내일 아침 일찍 평택 역전으로 짐을 가지고 모이라고 하여 우리 피난민 일행은

칠원리 부락을 하직하고 봇다리를 지고 이고 평택역전에 모였다.

 

몇 천명이 기차 짐칸에 몸을 실었다

기차는 남으로 내려간다 대전을 지나 전라도 전주시 역전에 도착하여 하차하니 6월 말이다.

2100명이라며 직조공장자리 종방이라 하는데 임시 피난민 수용소다.

이 수용소에서 며칠 기거했는데 또 분산시킨다.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으로 가라 하여 피난민 450명을 인솔하고 용진면 국민학교 운동장에 도착했다.

면장이 각부락으로 분산시키는데 우리 식구는 용진면 산정리 불당골 , 정 씨 댁 외딴집이다.

이 집에서 첫밤을 자는데 밤에 총소리가 나는데 몹시 무서워서 밤에 밭고랑에 숨어있었다.

밤에 그 총소리는 공비가 낮에 는 산속에 숨어있다가 밤에는 부락에 와서 곡식과 소를 토벌해 가져갔다.

지서도 습격하고 당시에 공비가 대단했다.

하루 지나 사는데 풍편에 들으니 장모님이 6월 15일에 별세하셨다는 소리만 듣고 가보지도 못했다.

아내에 슬픈 심정 이루 말할 수 있으리오... 누구에게 말을 다하리 십중팔구 한숨과 눈시울만 적시웠다

나는 낮에는 피난민 사무소에 나가 이를 보았다.

산에 가서 나무도 해다 땐 다 하루 종일 나무 한 짐 해온다

이렇게 세월 보내는 것이 몇 개월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났다.

아버지는 먼저 살 자리 보러 가신다고 강원도 원주을 향해 떠나가시고

나는 식구들과 같은 피난민 일행과 음 팔월초에 전북 완주군 용진면 산정리 불당골 정 씨 댁에 인사하고

가족과 출발하여 군 트럭에 짐을 싣고 난민 일행이 전주을 출발하여 공주 금강을 건너 저녁녁 조치원을 지나

밤새도록 오는데 군 헌병하는 말이 충북 박달재라 고 하는데 차를 세워놓고 한 시간 동안 쉬었다.

새벽에 다시 출발하여 아침 8시경에 강원도 원성군 흥업면 사제리 난민 수용소에 도착하여

아버지 거처를 못 찾고 셋째 명재형님 처남이 있었는데 찾으니 원주시에 나가있다고 했다

사재리에 며칠 있다가 아버지 찾아간다고 박 씨와 같이 봇짐을 지고 원주을 지나 횡성땅에서 산길로 얼마 가니

해는 서산에 다 지고 인가는 한두 집 드문드문 사는데

한 집주인을 찾아 하룻밤 신세 지자며 아버지 얘기를 했더니 안 씨 노인이 이곳에 오셨다

수일 전에 원주 소초면 모래기 동리로 가셨다고 하여

나는 마음이 놓여 그 댁에서 하루 밤 잘 자고 태산 같은 신세을 지고 봇 짐은 그  집에 두고 원주 모래 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모래기 동네를 찾아들어가 한집 두 집 들려 아버지 을 찾으니 마침 김시배 씨 댁에서 아버지를 만나 거기를 출발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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