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자서전 3
1953년 625 사변이 끝나고 54년 수복과 동시에 새로 지은 집
북괴 인민군은 삽시간에 서울을 함락했다.
인민군은 남쪽으로 계속 전진했다.
경상북도 대구까지 점령하였다가 후퇴하기 시작했다.
북괴는 전쟁을 도발하려고 청년들을 강제로 입영시키면서 건 말로
아무개는 조국을 위해 자진 입대 했다 선전을 하며 남아있는 청년들을 다 입대시키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유도하여 나는 한 여름에 삼을 베다가 칼로 발바닥을 째고
삼 글갱이에 발을 찔렸다고 하면서 방에서 밖으로 아니 나오고 며칠을 있으니까
발에 상처는 어느 정도 낳아서 가재울 벼는 베어 널었다.
그 후 음 팔월 6일 동네 반장이 와서 하는 말이 내일은 자동차 방공호 파러 가는데
아침 일찍 리 사무소로 모이라 했다.
8월 7일 일찍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날이 완전히 밝기 전에 리사무실로 갔다
당시 행정구역 명칭은 상노 2 구였다.
상노 2구에 여러 사람이 방공호 파는 작업에 집집이 한 사람씩 왔기 때문에 많이 모였다.
먼 동이 터서 훤해지니까 , 상노 2구 인민위원장 박승일 , 노동위원장 최태순이 말하길
오늘 작업장엔 30세 이상은 철원 작업장을 향해 출발시키고 30세 이하는 잠시 후에 면당부로 가라고 하며 출발시켰다.
본인 외 구보열, 임원재, 박삼용, 홍용설, 임충빈 , 구근용, 장병모, 우리 8명 일행은 동송면 당부로 갔다.
면 당부에 바로 철원 군당 1 군사동원부로 이송하여 군사 동원부로 갔다.
당시 철원군 포천군 연천군 3개군에서 3,000명이라 하며 신체검사를 한 후 , 8일 오후에 8월 10일 오전 5시까지 본장에 모이라 하며
해산시켰다.
나는 우리 부락 동료들과 집에 왔다 가기로 했다
집에 오는 길에 나는 추석이 얼마 안 남았으니 추석 제사에 쓸 과일과 명태 등 제수를 조금 사가지고 왔다.
어둑해져 저녁 먹고 자고 일어나 아침 식사 후 나는 늙으신 부모님 께서 살아나가실 생각 하니 한 숨과 눈물이 나와
마당 한쪽에서 댑싸리 비를 몇 자루 매고, 할머니 산소에 가니 눈물이 흘러 억지로 참고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집을 떠나 한 걸음 두 걸음 걸어 만나는 사람들과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동요들과 걷기 시작하여 철원 군사동원부까지
제시간에 도착했다.
얼마 후에 해가지는데 저녁 식사 주먹밥을 한 덩이씩 주어 그 걸 먹고 어둠이 시작되니 동원부에서 인원 파악을 한 후
출발하기 시작했다.
선창 역전을 지나가는데 동료들은 노래를 부르더라 ,
노래는 다음과 같다.
떠나가면 선창역이요
언제 다시 오려나
정든 땅 고향 친구들은 남모르게 눈물로
때려라 부시어라 38도 경계선 무찌르고
무찌르고 때려 부수어 조국통일 시키자.
이 노래는 지금도 생생하지...
한 거름 갔는데 월정역이라며 또 이 노래를 불러 월정역이 떠들썩했다.
얼마 가다 쉬니 닭 우는 소리가 들려 보니 가곡 역전이였다(평강).
나는 살성이 약해 아프길래 보니 양쪽 발 뒤꿈치가 터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잠시 쉬고 다시 출발하여 가곡역을 지나 평강 군사동원부에 도착했다.
동원부에서 하는 말이 비행기 폭격 때문에 산으로 들어가 숨어있으라고 해 모두 산속으로 가 숨어있었다.
평강군 남면 땅인데 산에 소나무가 낙락장송으로 잘 자라 있어 임시 은신처는 제일이었다.
해가 떠서 맑은 날씨 거기만 해도 철원보담 몹시 추웠다.
해가 떴는데 아침식사 주먹밥 한 덩이에 무 김치 두어 쪽 주린 배에 얼마나 맛이 있던지...
발은 터져 아픈데 짚 신발은 다 해졌다
할 수없이 책임 자을 찾아 발을 보여주며 짚신 얘기를 하고 평강시내에 가서 이 짚을 얻어와서
짚신을 두 켤레 삶았다.
석양에 해가 지니까 저녁 식사에 밥 두덩이 와 김치 두쪽 주어서 먹었다.
인원 파악 후 어둑해지니 출발이 시작되었다.
초계 벌판을 지나는데 비행기가 조명을 비추며 돌아치니 행군을 중지하고 돌아서라 하더니 도루
평강을 향해오더니 평강 어느 국민학교에 도착하여 학교에서 잤다.
새벽에 일어나 전날 숨어있었던 소나무밭에 도착하여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가 저녁 식사 후 출발했다.
복계역을 지나 검불랑역을 지나니 여기저기서 새벽닭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날 집결은 하늘 아래에서 제일 높은 세포를 지나 호양과 삼방과 삼거리가 목적지다.
검불낭을 지나 조금 가니 전에 세포서 살다 온 장병모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세포서 살다가 상노리로 이사 같다.
그래서 여기 지리을 잘 아니 우리 몇 사람만 나와 같이 지름길로 빨리 가 나 살던 곳에 가서 뭇국이라도 얻어먹고 가자
해서 우리 동네 몇 사람 은 장병모와 같이 샛길로 가서 주인을 깨워 병 모라고 하며 얘기하니
방으로 들어오라 하여 들어갔더니 잠시 후에 옥수수쌀밥에 뭇국을 지어와서 추워 떨 든 차 뜨뜻한 방에서
그 음식을 먹으니 정말 맛있게 먹어서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다.
주인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동틀 무렵에 출발하여 목적지에 도착하여 산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저녁 식사 후 다시 출발하여 삼방골통을 향해가니 그날 삼방역전이 폭격당했다며 약수 티에가 잠시 쉬라 하여
삼방약수를 처음 맛보았다.
첨 먹으니 약수 맛이 아려서 도로 뱉어버리는 사람이 많았다.
얼마 후 다시 출발하여 행군하는데 , 옛날 궁예왕에 무덤이라는 곳, 그 옆에 큰 전나무가 서 있는데
왕건에 패하여 궁예가 이곳을 지나가는데 군중이 모여들어 돌로 때려 죽어 이곳에 묻혀 궁예왕에 돌무덤이라고
하더라..
나는 발이 하두 아파 나무 지팡이를 짚고 일행을 따라갔다.
몇십 리 상방골 구고산에 도착하여 아침식사를 하고 산속에 있다가 저녁식사 일찍 먹고 출발하는데
발이 아파 도저히 갈 수없어 인솔자에게 나는 빨리 못 가니 그런 줄 알라 했더니
뒤떨어져있으면 암호를 알아야 한다며 암호를 알려주고
동네서 같이 온 몇 사람과 같이 안변 군사동원부가 목적지라며 출발했다.
얼마 후 한곡에 다다르니 큰 양회다리가 있는데 안변 앞다리라 하였다.
8월 13일 달은 유난히 밝아 우리 집에도 저 달빛 변함없겠지 , 벼는 갔다가 탈곡했을까
우리 부모님 얼마나 근심 중에 저 달을 보시겠지
어머니와 내 아내는 나 잘 다녀오라고 밤이면 장독단에서 칠성님께 청수 받치며 기도하셨다는데 얼마나 괴로우실까
생각 끝에 안변 앞다리 길구나 하면서 지나가며 난간을 세어보니 36개였다
새벽이 되어 닭이 우는데 새벽 찬 바람에 높이 솟은 저 기러기는 울면서 따뜻한 남쪽으로 가는데
우리는 언제나 남쪽집으로 가나 , 조급하고 그리운 마음 달은 밝은데 앞이 캄캄해져 눈밑을 닦고 좌우를 보니
안변읍이다
안변 군사동원부에 갔더니 우리 오기를 대기하고 있다가 도착하니 인원 점검하고
산등으로 올라가니 조그마한 건물 두 채에 앞마당이 좀 넓은 건물 앞,
거기 동원부에서 하는 말 이 신체검사를 곳 실시할 테니 아파서 신체 검사할 사람은 운동장에 남고 신체검사 안 할 사람은
숙소로 들어가 식사 들고 편히 자라 하였다.
나는 신체검사를 받으러 들어갔다.
아래 우칸에서 군의관이 신체검사하는데 등잔불을 켜놓고 날더러 오라 하여 가서 않으니 아픈 곳을 말하라 하여 양쪽발을
보여주니 이것은 괜찮다며 합격이라며 나가랜다.
나는 밖에 나와 보니 우리 일행 장병모 불합격 오지리 이형선 이 배가 아프다고 했더니 불합격 일행 두 사람이 불합격 보니 몹시 애가 타서
나는 웃옷을 벗어 다른 사람과 바꾸어 입고 머리에다 수건을 쓰고 위칸에 군의관에 갔다.
아픈데 이야기하라 하여 아프기도 하지만 침을 뱉으면 침에 붉은 피가 항상 나온다고 했더니
침을 뱉어보라 하여 기침을 하며 침을 뱉었더니 붉은 피가 나왔다.
다시 한번 군의관은 고개를 끄떡이더니 또 한 번 뱉었더니 불합격이라고 하여 나왔다.
불합격된 사람도 몇십 명 잘 되었다.
합격자는 다 숙소로 보내 식사를 주고 재우는데 불합격자는 숙소도 못 가고 식사도 안 주고 개인행동도 못하게
하며 반동분자 새끼들 욕하며 원산에 복구대로 보낸다고 하였다.
날이 밝아 해는 높았는데 먹을 것도 안 주어 배는 몹시 시장한데 한 면에서 한군이 한 사람이 와 보니
오지리에서간 조태성 아들이었다.
우리 일행은 돈을 모아 그 군인에게 부탁하니 음식은 없고 과일뿐이라 하여 사과를 사 와서
사과로 임시 허기를 달랬다.
좀 지나니 속이 쓰려서 몹시 괴로웠다.
석양에 해는 얼마 안 남았는데 동원부 군인이 하는 말이 반동 놈들은 원산으로 보낸다고 야단치더니
신체검사 불 합격증을 주며 철원 군사동원부에 갔다 주라며 철원으로 가라 하였다.
속으로 얼마나 좋은지 동원부를 출발하여 안변읍을 건너 지나는데 한편에 부인이 고구마을 쪄놓고
있어 판다 하여 찐 고구마를 사서 들고 오면서 먹었다.
해는 져서 저물었는데 어디에서 자나 근심을 하며 우리 동행 세명은 내가 발이 아프니까
빨리 못 가고 같이 오는데 신고산에 도착하여 한 집에 들어가 쉬어가자고 하니 안된다고 하여
다음 집에 갔더니 가을 타작을 하고 북어 지을 쌓아 놓은 게 있어 주인을 찾아 북어지터미에서 잘 수 있냐고 하니
승낙하기에 북데기 깔고 덮고 자려고 떠들썩하니 몇 사람이 지나가다가 우리 자는 걸 보고
발로 툭 차며 빨리 일어나 고산 앞 철다리가 폭격에 망가졌는데 빨리 복구사업가라고 야단처 할 수없이 일어나서 출발했다.
신장노를 비껴 벌판으로 얼마 가니까 밭에다 옥수수 세워놓은 것이 있어 우리 일행은 옥수수집속에 들어가서 셋이
서로 어깨동무을 하고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에 어디에서 여러 사람에 말소리가 들려 내다보니 먼동이 트는데 복구사업 하던 사람들이 집으로 가는 길이였다
우리 일행은 일어나 신고산을 향해 걷는데 벌써 해는 수건 길이만큼 떠 있었다.
신고면 소재지 걷다가 내무서원에 조사받고 나오는데 음식 파는 건 못 보고 한 군데 두부 파는 곳이 있어
맨 두부를 사 먹고 출발했다
삼방골에 오는데 배가 고파 나뿐 마음으로 남에 옥수수밭에서 옥수수를 따서 불을 해놓고 구워 먹으면서
길을 걸었다.
그렇게 걸어서 세포에 도착하였다.
아마 저녁 7시경이다.
장병모 인솔로 한 댁에 갔더니 저녁식사를 잘 주셔서 잘 먹고 편히 자고 피로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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