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의 자서전

아버지의 자서전 1

따뜻한 하루 2016. 1. 24. 16:24

아버지의  자서전 1

 

 

                                         제4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

 

                   강원도 무형문화재 9호 안승덕 옹(부친) 제40회 전국민속경연대회장에서 (제주도 )

 

프롤로그

아버지는 1926년 4월 17일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상노리 618번지에서

조부 교응, 1857년 11월 19일 , 조모 동주최 씨 1867년 12월 16일  , 부 장호 1889년 9월 17일 모 풍천임 씨 1889년 3월 15일

순흥 안 씨 27 세손으로 , 3녀 1남의 독자로 태어났다

위로는  1912년 9월생 첫째 누님  언년, 둘째 누님 1917년 5월 15일생 정렬 , 1920년 3월 5일  

세째누님  이 계셨다.

태어나 9세 되던 해 아버지에 이끌려 한학을 공부하고 , 늦은 나이 13살 1937년에 관인공립심상소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일 학년을 다니고 , 이학년 진학 후, 일제하  일본군 징병을 염려한 할머니의 간곡한 성화에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18세 되던 해 음 12월 11 일 큰 누님의 중매에 풍천임 씨 집안 정재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1926년 병인 4월 17일생  출생 후 어리고 철 몰랐고  6~7세가 되어도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9살 먹은 후 정 2월 하루는 아버지 어머니  글 배우러 가라 하시는데 가기를 싫어했다.

원인은 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가기를 싫어했다.

이 시절에 친구는 두 명이었다.

한 사람은 의호의 형 봉호요 , 한 명은 우리 안씨네 외손 이근화였다

아버지의 강요에 매을 맞으며 할 수없이 지금 중구재 동네 박승권네 집이었다.

서당에  들어서니 나와 비슷한 아이들이 몇 명 있는데 전부 모르는 사람이다.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선생님께 절을 해라 하시어 절을 했다.

선생님이 앞에  앉으라 하시니 그 옆에 앉아 글을 배라 하시며 책을 펴 놓더니

하늘 천 따지 가물현 누를 황 이 말을 따라 하라 하여 자꾸 따라 했다.

얼마 후

혼자 해봐라 하여 혼자 잘못하여 며칠 다니고 난 뒤 한 두자  알기 시작했다.

이때에 우리 식구는 병환중 이신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모두 다섯 식구였다.

그래 언제나  집안이 쓸쓸했다.

어떤 때 큰 누님이나 , 작은 누님이 오신다. 아니면 오남숙임이 오신다.

그 세분 중에 누가 오셨다가 가실 때에는 왜 그렇게 섭섭한지

마음속으론 가면 어떡하나 근심에 잠겨 있었다.

 

이렇게 자라던 중 10살  먹은  해 1935년 병자년 정월 17일이다.

이날은 웬일인지 집안에 여러분이 오셔서 게시는데 ,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겠다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았다.

점심때가 지난 후 지금 생각하면 3~4시 정도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등에 다 업고

집을 한 바퀴 돌으시고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해가 질 무렵에 할아버지는 운명을 하셨다.

어두운데 초혼을 하고 아버지 어머니 작은 삼촌내외 여러분 통곡을 하시며 집안은 울음바다에 잠겨 있었다.

할아버지는 정사생 이시며 80세 일기로 별세하셨다.

할아버지 장례식은 칠일장으로 거행하였다.

 

매월 초 하루 보름에 아버지는 상복을 입으시고 할아버지 묘소에 다녀오셔 삭망 제사를 지내시며 삼우 졸속 소상

대상 담제사 다 지났다.

나는 13살 1937년에 관인공립심상소학교에 억지로 입학했다.

학교에 다니는데 이따금 선생님께서 싸리비를 가져오라 하시어 , 빗자루를 가져가면 , 선생님께서 공책을 주시기에

한 자루 매오라 하시면 두 세자로 매 가면 공책 연필을 많이 주셔 빗자루나 새 꼬랑이를 꼬아가면 주시는 공책과 연필을

사지 않고 충분히 써나갔다.

 

일 학기 방학을 하고 집에 오려고 하는데 학교에 소사가  너는 몇 등했어하며 통신 표을 빼서 보더니 야! 이놈 봐라

일등이네   하더라

방학이 끝난 후 개학을 했는데 첫날 아침 출석을 부르기 전에 선생님께서 , 이학기부터는 공부한 순서에 의해 출석을 부른다며

일등 한 사람이 반장이 된다 하시더니 , 제일 먼저 출석을 부르시며 네가 오늘부터 학년 반장이다 하셨다.

 

이학년이 된 후 여름에 할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학교를 배우면 일본 병정으로 데려간다 하던데 제발 학교를

다니지 말라고 수차 성화를 하시는 차에 학교에 내는 매월 월사금을 부모님께 달라고 하기가 너무 어려워 결국 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가 혼자 농사하시는 일을 도와드리기 시작했다.

이해 가을에 나무를 베어 모아 오래된 집을 헐고 새로 지었는데 일곱 칸이었다.

그때 목수는 김죄성씨였다.

 

17세 된 후 왜정 말기인데 청년단을 조직하여 , 가끔 청년단을 모아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해 어느 달에 청년단은 주재소로 모이라 하여 이평1리 긴 발리에 주재소가 있었는데

여기에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 주재소장이 하는 연설이 이번에 싱가포르를 함 낙하여 경축으로

시위행진을 하는데 상노리 등말에 와서 해산했다.

 

18세에 이르러 음 7월 어느 날 산에 가서 퇴비를 베고 해 가져 집에 왔더니 창호씨네 아주머니가 와서

(어느 날 원재 아버지가 오셨는데 아버님이 마루에 오라시며 지필을 놓고 사주를 쓰라셨다 )

하시는 얘기가 혼기가 다 되어 간다며 나를 보시더니 큰 누님이 중매를 하니까 예쁜색씨를 데려온다며

놀리는 바람에 몹시 부끄러웠다.

그해 음 12월 11일 메밀쌀 한 섬 국수를 눌렀는데( 한편에선 큰 상을 차린다고 고임새를 하여서 큰 상이 무엇인가 하고 ) 하두 지루하니까 ,

김춘봉이라는 사람이 닭장옆에 서서 볼기짝을 치며

닭 우는 소리를 하니까 닭이 울기시작하여  동네 닭이 모두 울어 대들아....

                            아버지, 어머니 67주년 결혼-기념일 

 

12월 12일 날은 맑고 보통으로 추웠다 ,

오리말 (이평5리 ) 처가댁에 가 대례를 지내고 네 시경에 집에 오는데 오후에는 날이 흐렸다.

집에 도착하니 준비했던 음식으로 큰 상을 차려 신부에게 주시더라.

20살 되던 해 정월 어느 날 동송면으로 오라 하여 , 임충빈 , 홍문설, 박삼용, 유명록, 구근동 6명이 동송면에 갔더니 병사계가 하는 말이

오늘부터 훈련을 받으라며 훈련에 안 나오면 주재소에 가둔다고 하면서 동송국민학교로 가라 했다.

면소재지는 대위리인데 화지리라고도 한다.

동송국민학교는 지금 오덕2리 양촌학교자리,

 

4월 어느 날

훈련을 받고 교실 청소를 하는데 달까 평안도 사람이 너무 떠들어 교관이 와서 하는 말이 단체 기압을 받는데 로가에 다나와가  

일렬로 스라더니 참대 몽둥이로 한 사람당 세대씩 때리더니 , 운동장으로 몇 초까지 나오라더니 죽세라고 하더니

운동장을 무조건 다섯 바퀴 뛰라 하며 10등 외는 5번 뛰라 하여 기압을 받았다 ,

6월 장마철 어느 날 비는 폭우로 오는데 지금 오덕교에 갔더니 물이 많아서 못 건너가고

돌아 나와 화지리 고금바위 앞에 거문다리를 건너 학교에 갔더니 훈련생은 몇 명밖에 나오질 않아 교관은 생도에게

선의의 마음으로 교육도 안 시키고 귀가하라 하여 , 집으로 와 서  이튿날 또 갔더니 교관은 좋지 않은 기색으로

어제 온사람만 일렬로 서라고 하더니 , 어제 결석한 사람은 이열로 서라고 하더니 서로 뺨 열대씩 때리라 하여

칠팔 개를 때리고 한 개만 약하게 때려도  다시 열개를 때리게 하여 큰 기합을 주더라..

나는 7월 초 어느 날 학질을 알기 시작하였다.

훈련생은 신체검사를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철원읍내에 구세병원에 가 진단서를 떼어 제출하고 신체검사는 빠졌다.

그 후 팔월 어느 일요일 아버지와 삼촌 세 사람이 담터 안에 피나무 두덕 골에가 집 재목감을 베고

해진 다음 집으로 오는데 지금 노수산집 앞에 오는데  홍선익이라는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더니

해방이 됏대! 해방이 되었대 해서 첨엔 해방이 무엇인가 하고 의아해하며 , 해방이 무엇이요 했더니

일본이 항복했단다.

나는 꿈인지 생인지 어리둥절했다.

유언비어인가?

정말! 해방이 되었는가 하며 동네 입구에 와보니 모든 사람들은 수성거리더라..

저녁 식사를 먹는데 누가 와서 태극기를 빨리 그려야 만세를 부른다고 하더라

그래도 의아한 마음은 풀리지 않고 궁금한 마음으로 태극기를 그리어  온 마을 사람들은 동네복판 안창호 씨네

마당에 다 모여서 천지가 진동하듯이 만세가 울려 퍼졌다.

(이것이 1945년 8월 15일 해방이다 일제 36년 탄압은 잠시에 무너지고 말았다 )

좀 있으니까 이 마을 저 마을 곳곳에서 우렁찬 만세소리는 산천초목이 울듯이 진동하였다.

 

해방 전 아버지에 옛 집터자리엔 목장이 들어섰다 (아래 )

* 저희 부친 안승덕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9호

선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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