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인생 (비지니스 )

유지담 대법관 퇴임사

따뜻한 하루 2005. 10. 11.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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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담 대법관 퇴임사 전문
  
  저는 35년 동안의 법관생활을 마치고 이제 정든 법원을 떠납니다. 사건기록에 파묻혀 6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동료 대법관님들과 후배법관 및 직원여러분의 곁을 아주 떠난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잘했다고 내세울게 아무것도 없고 잘못한 일들만 생각납니다.
  
  환송해 주는 여러분을 뒤돌아 볼 면목조차 없이 떠나게 되어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다는 자만에 빠져, 얄팍한 법률지식을 자랑으로 여기며 법관생활을 시작한 때의 교만했던 제 모습이 제일먼저 떠오릅니다.
  
  법관으로서 가야 할 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나 목표설정도 없이 첫 출발을 하였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인사 때마다 일희일비하고, 주변으로부터 소외 당하지 않으려고 때로는 소신도 감춰가며 요령껏 법관생활을 했습니다.
  
  저는 평소에 명성이 높은 개선장군보다 이름 없이 죽어간 무명용사 중에 우리가 더 머리 숙여 추모해야 할 사람이 있다고 믿으며 살아 왔습니다.
  
  저는 특정분야의 법 이론에 밝아서 훌륭한 저서를 남기거나, 특정계층의 이익보호에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거나, 항상 다른 사람보다 앞선 자리에 발탁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그러한 법관보다, 남에게 내세울 만한 행동이나 업적은 그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몫으로 돌리고 오로지 국민을 진정코 섬기는 마음으로 자신이 맡고 있는 사건 하나하나의 처리에 온갖 정성과 노력을 다하여 한 사람도 억울함이 없도록 사필귀정을 이루어 내면서 사건당사자 모두를 위하여 묵묵히 봉사하는 그러한 법관이 더욱 더 자랑스러운 법관이라고 생각되어 후자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법원을 떠나는 지금 이 순간 묵묵히 봉사한 무명용사는 커녕 후회되는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저는 사법권의 독립이 보장되어야 하고, 법관과 법원의 권위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등의 당연한 말조차 남기고 갈 자격이 없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법적분쟁에 휘말려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민들을 위하여 마땅히 했어야 할 봉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또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가 사법부 독립의 침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저 자신의 부족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건 당사자들의 입장을 깊이 헤아려서 그들의 주장을 충분히 들어주며 신속하고 공정하게 결론을 내려 주는 것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법관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덕목임에도 불구하고 당사자가 주장하는 말을 자세히 듣거나 써낸글을 끝까지 읽는 것을 가지고도 마치 시혜적인 일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습니다.
  
  당사자의 처지를 전혀 고려함이 없이 저의 편의만을 생각하여 재판기일을 정하고, 연기신청을 받아 주는 데는 인색하면서 직권으로 재판을 연기하기는 거리낌 없이 했습니다.
  
  충분한 기록검토와 휴식을 취한 후 맑은 정신으로 재판에 임하겠다고 항상 다짐하고는 이를 실천하지 못했고, 오히려 피곤한 몸으로 재판에 임하여서는 당사자의 주장이 장황하다고 탓하며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는 말의 의미를 제 나름대로 해석한 나머지 판결의 결론에 이르는 과정의 중요성을 망각하기도 하고 사건 당사자들의 편의를 배려하는데도 소홀했습니다.
  
  이론을 연구하고 판례를 숙지하기 위한 노력만큼 사건기록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사실을 파악하는데 정성을 쏟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그렇게 했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법복을 입고 법대 위에 앉아서 재판권을 행사하는 법관의 권위는 그 법대 아래에 내려가서 재판을 받고 있는 사건 당사자의 발을 씻겨주는 심정으로 그들의 답답함을 풀어주려고 정성을 다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법관의 권위는 무조건 지켜져야 하고 법관은 국민으로부터 당연히 존경과 신뢰를 받아야 한다고 강변하기도 했습니다.
  
  까다로운 절차규정의 준수만을 지나치게 고집한 나머지 실체적 정의의 실현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한 적은 없었는지, 그래서 사법적 절차에 접근하는데 익숙하지 못한 서민들의 보호를 소홀히 한 적은 없었는지 두려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이제 35년을 몸 담았던 법원을 떠나면서 제가 무엇보다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권력에 맞서 사법부 독립을 진정코 외쳤어야 할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에는 침묵하였으면서 정작 사법부에 대한 경청할 만한 비평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때 이를 외면한 채 '사법권 독립'이라든지 '재판의 권위'라는 등의 명분으로 사법부의 집단이익을 꾀하려는 것으로 비쳐질 우려가 있는 움직임에도 냉정한 판단을 유보한 채 그냥 동조하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환송을 받기보다 용서를 구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려운 사건에 접하여 고뇌하던 동료 법관들에 대한 격려에 인색하고, 빛도 없이 열심히 재판사무를 보조하고 법원조직의 순조로운 기능에 크게 기여하면서 묵묵히 사건당사자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반직원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정성이 부족했던 것도 몹시 후회됩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밝고 가벼운 마음으로 법원을 떠나려고 합니다. 사법부의 어제와 오늘을 누구보다도 소상히 파악하고 계실뿐 아니라 국민위에 군림하던 그릇된 유산을 청산하고 진정으로 국민을 섬기는 법원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신 이용훈 대법원장님을 사법부의 수장으로 맞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법부 구성원 모두가 새 대법원장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 격려하고 화합하며 긍지를 가지고 봉사함으로써 국민으로부터 진정으로 사랑과 신뢰를 받는 새로운 모습의 사법부를 탄생시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앞으로는 저와 같이 후회스런 말만을 남기면서 법원을 떠나는 법관이 한분도 없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