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풍(願豊)]
세상일에 서툴러 버림받은 이 몸이 밭이랑 사이에서 늙어가니
세상 밖의 일은 내가 알 수 없고, 또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인고.
이 속에서도 나라 위한 붉은 마음은 풍년을 원하노라.
[춘(春)]
이웃 농부가 찾아와 이르되, 봄이 왔으니 밭에 나가세.
앞집에서 소를 보내고 뒷집에서 따비를 보내네
아아! 내 집 농사부터 하랴, 남부터 먼저 하니 더욱 아름답구나.
[하(夏)]
여름날 한창 더울 적에 햇빛에 달아있는 땅이 마치 불 같도다.
밭고랑 매자하니 땀이 흘러 땅에 구르네.
아아! 곡식 한 알 한 알의 고생을 어느 분이 알아 주실까?
[추(秋)]
가을이 되어 곡식을 보니 좋기도 참으로 좋구나
내 힘으로 이룬 것이니 먹어도 맛이 유별나구나
이 즐거움 외에 천사만종을 부러워하여 무엇하리오.
[동(冬)]
밤에는 삿자리를 꼬고 낮엔 띠풀을 베어
초가집 잡아매고 농기구를 손질하여라
내년에 봄 온다 소리 들리거든 곧 농사일 시작하리라.
[신(晨)]
새벽이 돌아와 사위 밝아지니 온간 것들이 소리하는구나.
일어나거라, 아이들아. 밭을 살펴보러 가자꾸나.
밤사이 이슬기운에 얼마나 곡식이 길어났는고 하노라.
[오(午)]
보리밥 푸짐하게 지어 담고 명아주 국을 끓여
배를 곯는 농부들을 제 때에 먹이어라.
아이야! 한 그릇 가져오너라. 내 친히 맛을 보고 나서 그들에게 보내리라.
[석(夕)]
서산에 해 떨어지고 풀 끝엔 이슬이 묻어난다.
호미를 둘러매고 달을 등에 지고 집에 돌아가자꾸나.
이런 생활의 즐거운 재미를 남들에게 말하여 무엇하리오
-전가팔곡중에서 -
1664년(현종 5) 이휘일(李徽逸)이 지은 시조. 국문필사본.
가을이면 지금 익어가는 있는 논밭을 거두겠지만,
'내 힘으로 이룬 것'이라 기뻐하는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천사만종(부귀영화)'을 '부러워하지 않는 이'도 없을 테고,
호미를 둘러메고 달을 등지고 귀가하는 농부도, 그 황혼의 실루엣도 없다.
'이 중에 즐거운 뜻'을 아는 이는 물론 더더욱 없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