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7대 목종(穆宗) 때,
보개산 심원사는 647년 영원(靈源) 조사가 창건한 이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기 전까지 1,300여 년 동안 당대
수승한 고승대덕들을 배출한 전법 수행도량이자 수많은 일화와
기이한 영적(靈蹟)을 남긴 생지장도량으로 국태민안을 위해
기도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중부내륙의 가장 중요한 불교성지입니다.
심원사를 재창한 신라의 범일국사, 삼창한 조선초 무학대사를 비롯하여
근현대 선지식이었던 독립운동가 백용성스님,
전 조계종 종정 서암스님, 월하스님, 전 태고종 종정 안덕암스님 등
수많은 선지식들을 배출하였으며,
고려시대의 대학자인 민지(閔漬)를 비롯하여, 목은 이색, 조선의 매월당 김시습,
퇴계 율곡 등이 심원사를 자주 내방하여 주옥같은 글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일찍이 고려시대의 민지(閔漬)는
「보개산석대기(寶盖山石臺記)」에 금돼지 이야기를 기록하고,
보개산 전체는 바로 지장보살의 진신이 항상 머물러 설법하는 곳이라고 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보개산이 살아계신 지장성지(地藏聖地)임을 영원히 잊혀지지 않게 하였고,
또 보개산(寶盖山)은 머무는 사람이 영원히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지 않는
영산(靈山)이라 찬했습니다.
또한 조선 창업에 공이 컸던 무학대사는
1393년(태조2년) 화재로 심원사의 모든 전각이 전소(全燒)되자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3년에 걸쳐 1396년(태조5년)에 심원사를 삼창(三創)하였고,
조선 창건을 전후로 하여 태조 이성계는 여러 차례 보개산을 찾아
무학대사와 잦은 회동을 하였던 사실은 심원사의 지장신앙(地藏信仰)이
새 왕조 건국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250여 칸의 건물과 1,602위의 불상이 위엄을 드러내는 대찰이었던
보개산 심원사가 1907년 정미의병과 1950년 한국전쟁의 병화(兵火)로 소실되어
폐사지(廢寺址)로 방치되었습니다.
다행히 경기도와 연천군의 전통사찰 및 문화재 복원지원사업에 힘입어
2004년도에 천불전이 복원되었고,
심원사의 효과적인 복원을 위해 2005년 7월 연천의 옛 심원사 터를
원심원사(元 深源寺)로 개칭하여 사찰등록을 마치고,
이제 본격적으로 원심원사(元 深源寺) 및 석대암(石臺庵) 등 산내암자의 복원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그 찬란했던 산사는 간곳이 없지만 수많은 일화와 불가사의한 영적(靈蹟)은
아직도 불자들의 가슴에 전해져 신심을 고취시키고 있으며,
보개산 성지가 하루속히 복원되기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로부터 보개산 지장봉(환희봉)은 한반도 정중앙에 해당하는 영산(靈山)이라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남북통일과 국민화합과 호국신앙의 중심지로서의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할 것입니다.
* 심원사 천불
심원사 천불(千佛)은 최초로 신라의 범일국사가 모셨으며,
심원사지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천불봉안의 영적을 전하고 있습니다.
충남 당진에서 천불(千佛)을 조성하여 배에 모시고,
연천 임진강의 시무소(時蕪沼)에 정박하자 네 사찰이 천불을 봉안하고자
서로 다투므로 봉안처를 정하기 위해 종이 연[紙鳶]을 날렸는데
그 연이 보개산 심원사에 정착하여 천불을 심원사에 모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예로부터 심원사 천불은 영험이 대단하여 심원사 부처님을 모시고 있으면
절이 궁하지 않다고 하여 심원사 부처님을 각 사찰에서 서로 모시고자 했다고
우리 불가(佛家)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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