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병일의 경제노트, 2008.7.14)세종의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황희이다. 세상에 황희 정승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어쩐지 황희 정승의 인상을 그리자면, 역시 하얀 수염을 그득하게 그리고 온화하게 웃고 있는 노재상이 떠오른다...
황희는 무려 27년을 정승으로 있었고 그중 18년 동안 영의정 자리에 있었다. 이렇게까지 오래 정승의 자리에 있던 사람은 조선 역사상 다시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재상의 예로 들어지는 황희는 세종만큼이나 완벽해 보이는 인물이다.
우리사회가 시끄럽습니다. 경제가 매우 좋지 않은 가운데 광우병 문제에 이어 북한의 한국인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이 터지더니 오늘은 일본의 교과해설서 독도 영유권 명기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대개 현실이 어려울 때일 수록 역사에 관심이 가게 됩니다. 옛 리더들의 모습에서 위안을 받으면서 그런 걸출한 인물이 다시 나와주기를 기대하는 심정 때문이겠지요.
어제 TV 드라마에서 '대왕세종'을 시청했습니다. 한동안 보지 않았었는데 최근에 황희의 복귀와 태종의 죽음 등으로 관심이 가더군요.
사실 황희 정승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 지식의 대부분은 다소 윤색이 되었을 일화들을 통해서인 것이 사실입니다. 기억도 되살릴 겸, 가장 유명한, 하지만 언제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일화 한 개를 다시 한번 함께 보시지요.
검은 소, 누런 소 이야기입니다. 여름날 시골길을 지나던 황희는 한 농부가 누런 소와 검은 소를 데리고 일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황희는 별 뜻 없이 이렇게 물었다고 하지요. "두마리의 소 중에서 어떤 놈이 더 일을 잘 하오?"
그러자 농부는 황희의 옷소매를 끌고 밭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가, 황희의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런 놈은 일도 곧잘 하고 시키는 대로 말도 고분고분 잘 듣는데, 검은 놈은 꾀가 많아 다루기가 힘들답니다."
황희는 어이가 없어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노인장, 그게 무슨 비밀이라도 된다고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말씀하시오?"
그러자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미물이라 할지라도 저를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안답니다. 내가 만일 아까 그 놈들 근처에서 이 얘기를 했다면 그 놈들이 다 들었을 것 아닙니까? 어떻게 사람의 말을 짐승이 알아들으랴 싶지만, 나는 내 집일을 애써 해 주는 그 놈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소."
황희는 이 농부의 사려 깊은 행동에 감동을 받았고, 평생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조심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황희 정승에 대한 역사적 사실 몇가지를 살펴보시지요. 충녕대군의 세자책봉에 반대하다 유배를 갔던 황희는 60세인 세종 4년에 의정부 참찬으로 복귀했습니다. 어제 드라마의 장면입니다.
그후 강원도 관찰사, 이조판서, 우의정을 거쳤고 69세에 영의정에 오릅니다. 그리고 18년 동안 영의정으로 세종을 보필하며 '태평성대'를 만듭니다.
황희 정승은 서출이었다고 합니다. 첩, 그것도 노비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하지요. 그리고 황희는 평소에는 너그러웠지만 큰 일에는 시시비비를 가리며 고집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의 김종서를 자주 야단쳤는데, 이는 성품이 너무 강한 김종서의 기운을 미리 꺾고 경계해서 훗날 중요한 자리에 올랐을 때 가볍게 움직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특히 황희는 거시적인 시각으로 공명정대하게 원칙을 살리면서 난립하는 의견들을 조정하는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그리고 '설득'에도 능했습니다.
소헌왕후 승하후 세종이 왕실가족을 위해 불당을 지으려하자 집현전 학사들이 반대하며 동맹파업을 했을 때, 그들을 찾아 하나하나 설득해냈습니다. 여든 나이의 영의정이 직접 찾아와 설득을 했으니 젊은 유학자들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을 겁니다.
90세까지 살면서 조선을 태평성대로 이끌어갔던 리더 황희. 그처럼 온화하고 겸손하며 남을 배려할줄 아는, 하지만 중요한 일에는 거시적인 시각으로 원칙을 지키며 다른 이들을 설득하고 조정하는 능력을 지닌 그런 리더가 아쉬운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