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 본관및유래

순흥안씨 유래와 역사

따뜻한 하루 2007. 10. 31. 20:13

[유래와 역사]  [드러난 선조]   [각파보기]    [ 지역종친회]   [종중행사]

    ▶ 유래와 역사

순흥안씨는 순흥의 토족 성씨이다. 고려 신종(神宗1197-1204) 때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역임하고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된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가 순흥현(順興縣)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여 관향(貫鄕)을 순흥(順興)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증손 안유(安裕=珦으로 개명하였다가 조선조 문종 어휘와 같게 되어 초명으로 쓴다)가 크게 현달하여 생활 근거지가 개성으로 나뉘어져 살게 되었다. 시조 [子美] 아들 3형제를 두었으니 영유(永儒), 영린(永麟), 영화(永和) 이며 이를 각각 1파, 2

파, 3파라 부른다. 영유의 후손에 14개파, 영린의 후손에 4개파, 영화의 후손에 4개파가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 생활근거지가 파주 금촌으로 옮겨졌는데, 여러 사화를 겪으면서 전국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으며, 종가는 서울 도동에 있다가 다시 이북 연백으로 옮겨졌다. 특히 관향지 순흥에 살던 종족들은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드러난 조상으로는 시조의 증손 안향이 1260년[고려 원종 1년] 18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상주판관(尙州判官)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충령왕(忠烈王) 복위 때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유학(儒學)의 학풍(學風)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문하(門下)에서 백이정(白이正), 우 탁(寓倬) 등 훌륭한 유학자(儒學者)가 배출,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겨 문묘(文廟)를 비롯한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과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장단 대덕산에 있고, 경기도 부곡에 안자묘(安子廟)가 있다.

영린의 후손으로 안문개(安文凱 ?∼1338)가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일로 원나라에 불리어 가 4년동안 억류되어 있었을 때 함께 있으면서 왕을 위한 경비를 국내에서 염출하여 조달하였는데 원나라 조정에서 종정부(宗正府)에 가두었다. 왕을 따라 귀국한 뒤에 첨의참리(僉議參理)가 되었고, 1327년(충숙왕 14)에는 왕이 원나라에 있었을 때 충절을 바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으며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의 호를 받았다. 1330년(충혜왕 즉위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송천봉(宋天鳳)·홍언박(洪彦博)·이달존(李達尊)·이문정(李文挺)·최재(崔宰)·정운경(鄭云敬) 등 33인과 명경(明經)·은사(恩賜)각 2인을 급제시켰고 옥대(玉帶)를 하사받았다.

영화의 후손으로서 1324년(충숙왕11) 원(元)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한 근재 (謹齋) 안축(安軸)은 충혜왕(忠惠王) 때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순흥의 자연경관을 노래한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었으며「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文集)을 남겼다.

그 외 시호를 받은 선조가 32명에 이르며, 그중 문(文)자 시호를 받은 이가 17명이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는 안중근(安重根), 안병찬(安秉瓚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대궐에 들어가 통곡함), 안승우(安承禹 충주(忠州)의 황강(黃岡) 싸움에서 전사한 전사 ),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안익태(安益泰 애국가 작곡), 백산 안희제(安熙濟), 안재홍(安在鴻)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 유래와 역사


순흥안씨의 시조(始祖)는 휘가 자미(子美)이다. [어떤 족보에는 공석(公石)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신종(神宗1197-1204) 때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역임하고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되었으며 순흥현(順興縣)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여 관향(貫鄕)을 순흥(順興)으로 삼게 되었다. 부인에 대한 기록은 실전하여 알지 못한다. 묘소는 소백산(小白山)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비석이 없어 찾지 못하고 있다.

1654년에 후손 순원군(順原君[應昌])이 의성현감(義城縣監)에 부임하였다가, 시조(始祖)의 제사가 단절되고 선조들의 유적이 민멸된 것을 보고 경향의 종친들의 협력을 받아, 순흥 평리촌(坪里村) [현 석교리(石橋里) 203번지]을 고택유지(古宅遺址)로 추정하고, 시조공과 아들 태사공(太師公=휘 孚)의 제단을 만들고 해마다 제사를 올렸다. 이후 방손들의 제단과 합하여 졌다가, 1988년에 순흥 읍내리 비봉산 아래에 새로이 ·추원단(追遠壇)을 조성하여 이설하고 해마다 음력 10월 1일 전국의 후손 2천여 명이 참배하고 세사를 올린다.

갑신파보(甲申派譜 순조23,1824)에서 후손 기명(其命)이 진위(振威)에 사는 종친의 가첩의 기록에 근거하여, "시조공의 묘소는 동마암(東磨岩)에 있고 부인은 압해정씨(押海丁氏)로서 추밀부사 광서(光瑞)의 따님이다." 하였다. 이는 이전 족보에는 나타나지 않는 사실인데, 이전에 영천(永川) 정원욱(丁元旭)의 집에 소장된 구보(舊譜)에서 내사령(內史令) 정혁황(丁奕煌)의 사위에 안자미(安子美)로 기록하고 그 아래에 외손으로 태사공과 문성공의 휘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족보에 정식으로 올리지는 못하고 참고자료로 전하고 있다.

속설에, "안씨(安氏)의 초조(初祖) 안원(安援)은 본래 당(唐)나라 종실(宗室)인 농서이씨(농西李氏)였는데, 서기807년(당나라,헌종2, 신라,애장왕8)에 신라(新羅)로 건너와 개성(開城)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정착(定着)해 살았다. 그 후 경문왕(景文王) 때 와서 갑신란(甲申亂)이 일어나자 지춘(枝春)·엽춘(葉春)·화춘(花春) 아들 삼형제(三兄弟)가 난(亂)을 평정한 공(功)으로 安자로 (賜姓)하였다. 맏이 지춘( 枝春)은 방준(邦俊)으로 개명(改命)되어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고, 둘째 엽춘(葉春)은 방걸(邦傑)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으며, 세째 화춘(花春)은 방협(邦俠)으로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 순흥안씨는 광주군(廣州君) 안방걸(安邦傑)의 후손으로, 광주안씨(廣州安氏)에서 분적(分籍)하였다." 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근거가 없어 현재 순흥안씨대종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시조가 추밀공(樞密公) 영유(永儒), 별장공(別將公) 영린(永麟), 교서공(校書公) 영화(永和) 3형제를 두었다. 추밀공은 송 나라 가태 신유년에 출생하였으며, 바로 문성공 회선선생의 조부로서, 추밀원부사 상호군에 추봉되었다. 부인에 대하여는 실전하여 알 수 없다. 다만, 구보 기록에, "경주박씨 족보에서 계림군 박순(朴純)의 사위에 안영유(安永儒)가 등재되어 있으나 이는 우리 족보에 전해오지 않는 것이어서 참고로 기록해 둘 뿐이다." 하였다. 묘소는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甘谷里) 지장산(智藏山)에 있다. 후손 판서 상(王常)이 영천군수(榮川郡守=지금의 영주)로 부임하였을 때 재실 영모암(永慕庵)을 창건하고 위토를 마련하여 매년 10월 상정일(上丁日)에 제사를 지내왔다. 근래에 후손들이 묘소를 정비하고 '영모암관리위원회(永慕庵管理委員會)'를 설치하고 음력 10월 1일 순흥 추원단 제사를 올린 뒤, 오후 2시에 제사를 올린다. 슬하에 태사공 부(孚)를 두었다.

태사공 부(孚=가정 경진생)는 고려 신종 갑진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의대부(正議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태사문하시중(太史門下侍中)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강주우씨(剛州禹氏)로서 예빈시동정(禮賓寺同正) 우성윤(禹成允)의 따님이다. 묘소는 순흥에 있다고 전해지나 표석이 없어 찾지 못하고 있다. 시조공과 함께 추원단에 제단을 조성하고 제사를 올리고 있다. 슬하에 문성공 유(裕)를 두었다.

문성공은 휘는 裕(珦으로 개명하였다가 조선조 문종 어휘와 같게 되어 초명으로 쓴다), 자(字)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이다. 추밀공 영유(永儒)의 손자로서 송 가우 계묘년에 출생하였다.

1260년(원종 1) 18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상주판관(尙州判官)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충령왕(忠烈王) 복위 때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유학(儒學)의 학풍(學風)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문하(門下)에서 백이정(白이正), 우 탁(寓倬) 등 훌륭한 유학자(儒學者)가 배출,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로 훌륭한 업적을 남겨 문묘(文廟)를 비롯한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과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장단 대덕산에 있고, 경기도 부곡에 안자묘(安子廟)가 있어 음력 9월 12일에 기신제를 올리며, 음력 10월 4일 금촌 야동(冶洞)에 있는 현손 판서공[휘 종약(從約)]의 재사(齋舍)에서 망제(望祭)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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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러난 선조

향의 아들로 1282년(충렬왕 8) 문과(文科)에 급제한 우기(于器)는 우부승지(右副承旨)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고 충숙왕(忠肅王)이 즉위하자 지밀직(知密直)으로 새로 구입한 경적(經籍) 1만8백 권을 검열했으며,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와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등을 지낸 후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다. 고려가 망하자 형조 전서(刑曹典書)로서 벼슬에서 물러났던 원(정당문학 원숭의 아들)은 이초(彛初)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유배되기도 했으나 태조(太祖)가 구도(舊都)인 개성(開城)의 유수(留守)로 있게 하고 그의 충절을 극찬하여 후에 시호(諡號)를 경질(景質)로 하사(下賜)했다.

호상한 성품으로 구김이 없었던 그는 항상 책을 놓지 않았다. 어느 날 산골짜기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나서 이 첨(李詹)이 찾아가 보니 원이 나무에 기대어 왼 팔에 매를 얹어 놓고 오른 손으로 주자(朱子)가 지은 「통감강목(通鑑鋼目)」의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고 한다.

호부 낭중(戶部郎中)에 추증된 득재(得財:문경공 영화의 아들)의 후손에서는 밀직제학(密直提學) 석(碩)의 아들 5형제가 뛰어났다.1324년(충숙왕11) 원(元)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한 축(軸)은 충혜왕(忠惠王) 때 강릉도(江陵道)를 존무(存撫)했으며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文集)을 저술했고,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민 지(閔 漬)가 지은 「편년강목(編年綱目)」을 개찬, 충렬, 충선, 충숙왕 3조(朝)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특히 그는 경기체가(景幾體歌)인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을 남겨 문명(文名)이 높았고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우 보(輔)는 1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恭愍王) 때 동지공거(同知貢擧)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동경 유수(東京留守)를 역임했다. 축의 아들 종원(宗源)은 우왕(禑王) 때 환관(宦官)들의 전횡을 시정하는데 앞장섰으며, 대사성(大司成)과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판숭경부사(判崇敬府事)가 되어 순성보조공신(純誠輔祚功臣)에 책록되어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고, 청렴으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발탁 된 후 공양왕(恭讓王) 때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진봉되었다.

종원의 아들 3형제 중 막내인 경공(景恭)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創業)에 공을 세워 흥년군에 봉해졌다가 태종(太宗) 때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시호가 양도(良度)이다. 경기도 시흥에 불천위 사당이 있다. 양도공의 아들 순(純)이 세종(世宗) 때 명신(名臣)으로 유명했다. 순이 사헌부 잡단(司憲府雜端)에게 명하여 당장 죽이라고 하자, 순이 죄를 밝히지 않고 죽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상주하여 왕이 그의 말을 좇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 숭선(崇善)은 1420년(세종 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거쳐 동부대언(同副代言)에 올라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 정벌을 주장했다. 특히 그는 준수하고 호걸스럽기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을 때 재주와 학문을 인정 받아 황보인(皇甫仁) 후임으로 도승지(都承旨)에 발탁되었다.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 문개(文凱)의 손자 천보(天保:순흥군 천선의 아들)는 세종비(世宗妃)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조부로서 세종 때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으며, 부윤(府尹) 지귀(知歸)의 아들 침(琛)은 성종(成宗) 때 이조 참판을 거쳐 연산군 때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가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사예(司藝) 돈후(敦厚)의 아들로 성종 때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했던 당(塘)은 장중(莊重)하여 말과 웃음이 적고, 청백하고 검소하여 바른 것을 지켜 직무를 행했으며, 의(義)를 행함에 과단성이 있어서 임금에게 아뢰어 시행한 것이 많았다고 「당적보」에 적고 있다. 연산군이 사간원(司諫院)의 벼슬을 없앴는데,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대사간에 등용되어 무너지는 기강을 바로 세우고 원통한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 주었으며, 이조 판서가 되어 선비를 뽑아 인재 등용에 힘썼다. 강직한 성품으로 오직 나라 일에 전념했으나 소인들에게 미움을 받아 화를 입었다.

그가 일찍이 호서 안찰사(湖西按察使)로 나갈 때 시(詩)를 짓기를 <말고삐 잡으면서 천하를 맑게 하겠다던 옛 사람의 일을 내가 어찌 감당하랴 다만 충의를 가지고 내 한 몸을 꾀하지 않겠다> 하였다. 당의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오르자 그는 집안이 너무 성(盛)한 것을 염려하여 벼슬에서 사직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좌의정(左議政)에까지 올랐는데, 청렴한 성품으로 녹으로 받은 것 외에는 모아 둔 재산이 없어 부인이 갑자기 죽자 장사를 치루지 못하여 남에게 빌려서 치르니 사람들이 그의 청백에 감복했다고 한다.

명종조에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를 찬수했던 위(瑋)의 아우 현(玹)이 명종 때 현상(賢相)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청강사재록(淸江思齋錄)」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충성스럽고 청렴하여 청탁이 통하지 않았다고 하며, 등에 종기(腫氣)가 나자 의원이 말하기를 "지렁이 즙을 내어서 발라야 한다"고 하니, 그가 이르기를 "한창 봄에 만물이 생생한데 지렁이가 비록 미물이지만 어찌 내 병을 위하여 생명 있는 것을 죽이겠는가"라고 하였다 한다.

전적(典籍) 기(璣)의 아들 처순(處順)은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중부(仲父)인 침(琛)에게 의탁하여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구례 현감(求禮縣監))으로 나갔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은퇴, 다시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을 지냈다. 조광조(趙光祖)가 능성(綾城)에 유배되었을 때 그와 아는 체만 해도 잡혀 간다 하여 모두 조광조를 소외했는데, 처순은 멀리 구례로부터 올라와 조광조를 만나고 기묘사화로 남쪽에 유배되어 온 현량(賢良)들의 생활을 동분서주하며 구재했다.

그 밖에 순흥 안씨를 빛낸 인물로는, 양성 현감(陽城縣監)을 지내고 글씨와 그림으로 유명했던 (:병조 좌랑 처선의 아들)과 선조(宣祖) 때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했고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오른 자유(自裕)가 대표적이며, 위는 거제 현령(巨濟縣令)이 되어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벽파진(碧波鎭)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선조(宣祖)로부터 「무경칠서(武經七書)」를 하사받아,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싸움에서 의병장(義兵將)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순절한 (:처순의 증손), 역시 임란 때 남원(南原)에서 순절한 대중(大重), 사오(嗣吳)의 부자와 더불어 이름을 떨쳤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대궐에 들어가 통곡했던 병찬(秉瓚)과 충주(忠州)의 황강(黃岡) 싸움에서 전사한 승우(承禹)가 뛰어났으며, 도산(島山) 창호(昌浩)는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육성과 민족 계몽운동에 진력했다. 진사 태훈(泰勳)의 아들 중근(重根)은 만주 하르빈역에서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살해하고 <장부는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이 쇠와 같고, 의사는 위대로움에 임할지라도 기운이 구름 같도다>라는 유시(遺詩)를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애국가를 작곡한 익태(益泰)와 함께 의절(義節)의 가문(家門)인 순흥 안씨(順興安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남한(南韓)에 총 99,937가구, 417,5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호를 받은 선조

4세
향(珦) 문성(文成) = 道德博聞曰文 安民立政曰成
5세
우기(于器) 문순(文順) = 勤學好問曰文 慈和 服曰順
5세
문개(文凱) 문의(文懿) = 勤學好問曰文 溫柔賢善曰懿
6세
목(牧) 문숙(文淑) = 勤學好問曰文 道德純一曰淑
6세
축(軸) 문정(文貞)
6세
보(輔) 문경(文敬)
7세
원숭(元崇) 문혜(文惠) = 勤學好問曰文 柔質慈民曰惠
7세
원형(元衡) 문혜(文惠) = 勤學好問曰文 柔質慈民曰惠
7세
원린(元璘) 문렬(文烈) = 勤學好問曰文 忠君慈民曰烈
7세
종원(宗源) 문간(文簡)
8세
면(勉) 문정(文靖)
8세
우(佑) 문충(文忠)
10세
숭선(崇善) 문숙(文淑)
12세
지(止) 문정(文靖)
14세
위(瑋) 문희(文僖)
14세
현(玹) 문간(文簡)
17세
방준(邦俊) 문강(文康)

6세
천선(千善) 양정(良定)
7세
손주(孫柱) 경혜(景惠)
7세
천보(天保) 소의(昭懿)
8세
원(瑗) 경질(景質) = 由義而濟曰景 名實不爽曰質
8세
조동(祖同) 양공(良恭) = 溫良好樂曰良 敬事奉上曰恭
8세
준(俊) 충정(忠靖)
8세
수산(壽山) 소간(昭簡)
8세
경공(景恭) 양도(良度)
9세
순(純) 정숙(靖肅)
11세
승(勝) 탁경(卓景)
12세
침(琛) 공평(恭平)
12세
당( ) 정민(貞愍)
14세
치화(致和) 소절(昭節)
14세
홍국(弘國) 충현(忠顯)
22세
몽상(夢詳) 충익(忠翼)

    ▶ 각파보기

1파 종회(宗會)

2파종회(宗會) 3파종회(宗會)

 

소종중

├─참찬공파
├─찬성공파
├─직장공파
├─서파공파
├─감찰공파
├─첨추공파
├─도정공파
├─참판공파
├─참의공파
├─양공공파
├─한림공파
├─죽성군파
├─탐진군파
└─판관공파

소종중

├─안원군파
├─충정군파
├─의랑공파
└─소의공파

소종중

├─문정공파
├─좨주공파
├─중랑장파
└─검교공파

 

    ▶ 지역 종친회

 

  안자묘(안자묘) 기신제 참여

  1. 매년 10월 17일 [음력 9월 12일] 경기도 시흥 부곡 안자묘에서 10:00에 기신제를 봉행합니다.  우리 가문의 현조이신 문성공의 묘소는 파주 장단 눌목리[구정동]대덕산[비무장지대 안]에 있고, 옛날 사당은 황해도 연백군 화성면 총천리에 있으나 모두 이북 지역이어서 봉심하지 못합니다. 하루빨리 통일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묘소를 봉심하지 못하는 한스러움을 위해서도 많은 후손들이 참여하여 선조를 추모하고 종친간의 우의를 도모하시기 바랍니다.
  2. 장소:경기도 의왕시 월암동 425번지 철도고등학교 옆 [문의전화: 대종회=02-2266-1760, 안자묘[종택]=(031)-461-6306

 ◆  관향지 순흥 추원단(追遠壇) 세사

  1. 올해 11월 5일 [음력 10월 1일] 관향지 순흥 추원단에서 임오년 세사를 봉행합니다.  추원단은 1988년 11월 시조공을 비롯하여 묘소를 실전한 선조 12위의 제단을 세운 곳으로서,  이제 모든 역사가 마무리되어 명실상부한 순흥안문의 성지로 자리잡았습니다. 죽령을 통과하는 중앙고속도로가 완전 개통되어 교통도 1시간 가량 단축되었으니, 더 많은 후손들이 참여하리라 여깁니다.  
  2. 장소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413-1 "순흥안씨추원단"   지도상의 위치는 홈페이지의 <단소/묘소>로 들어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3. 추밀공파[1파]의 파조이신 추밀공[휘 영유(永儒)]의 세사를 추원단 세사를 마치고 영모암으로 이동하여 14:00에 봉행합니다.
  4. 교서공파[3파]에서는 추원단 세사를 마치고  제학공[휘 석(碩)]의 묘소[단산면 병산리 서창산21]로 이동하여 봉행하고, 그 이튿날  문정공[휘 축(軸)의 부인이신 감천군부인 문씨(甘泉郡夫人文氏) 묘소[봉화군 봉화읍 문단1리 산156], 문간공[휘 종원(宗源)]의 묘소[문단1리 산183]로 이동하여 세사를 봉행합니다.
  5. 관광버스를 이용하실 분들은 10일 전까지 대종회[02-2266-1760]으로 전화하시거나 홈페이지 <질문/응답>에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6. ◆  추밀공파[1파] 판서공(判書公) 세사
    1. 올해 11월 8일 [음력 10월 4일] 파주 금촌 판서공[휘 종약(從約)] 묘소에서 시제를 봉행합니다. 이곳에서는 아울러 문성공 이하 13 분[5공8부인]의 망제(望祭)도 봉행합니다. 특히 서울 경기 일원에서는 거리가 가깝고 교통이 편리하니 많은 후손들이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  교서공파[3파] 세사

    1. 올해 11월 7일[음력 10월 3일] 서울 양도공 산하 [금천구 시흥4동 54-2[백사동(栢寺洞]에서, 양도공 이하, 정숙공(靖肅公 휘 純], 문숙공(文肅公 휘 崇善), 소윤공(少尹公 휘 崇信), 감사공(監司公 휘 崇孝) 5부자 제위의 세사를 봉행합니다.

 

    ▶ 종친회



순흥안씨대종회 :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1가 23-16 [우편번호 100-141] 지하철 3, 4호선 충무로역 4번 출구 150미터 지점에 "순흥안씨종친회관"에 있다.

전화:(02)2266-1760, (02)2279-0598 02)2264-4575 FAX(02)2264-3310

1파 종회 : 위와 같다.

2파 종회 :

3파 종회 : 서울 금천구 시흥 양도공 산하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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